SPECIAL REPORT 모더니즘의 정수였던 독일의 디자인 스쿨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정신은 과거형이 아니다. 긴축경제부터 트럼프까지 한치 앞도 낙관적으로 내다 볼 수 없는 요즘.‘바우하우스의 설립 100주년이 되는 해’ 라는 구절은 괜시리 낙관적인 마음을 품게 만든다. 변화에 대한 갈망과 자유로운 생각을 통한 창의성으로 건축, 미술, 디자인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을 시도했던 독일의 디자인 스쿨 바우하우스.이런 혁신이 또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새로운 움직임바우하우스는 1919년 유럽 역사 격동기의 시점에 독일의 새 수도인 바이마르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옆의 모스크바에서는 공산당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며 새로운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유럽 전역에서는 구식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것은 세계 1차 대전이라는 대재앙을 일으켰다. 이후 독일에서는 희미하게나마 민주주의가 생겨나고 있었고 이와 함께 혁신을 향한 자유가 피어올랐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는 슈타틀리헤스 바우하우스라는 이름의 새로운 학교를 세웠다. 그의 사명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시각미술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미술계의 서열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생각은 당시의 독일 사회를 반영한 것이었다. 바우하우스는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구분을 없애고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미학체계를 개발했다. 이것은 도예나 판화, 텍스타일, 금속세공 과 같은 공예가 회화와 조각과 동등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사진과 그래픽 장르가 추가되면서 예술의 기능적 측면, 궁극적으로는 디자인에 초점을 두게 된다. 건물에서부터 찻주전자에 이르기까지, 실용성과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뤘다. 바우하우스의 학생들은 회화, 건축 또는 텍스타일 등의 전공을 바로 정하지 않고 예비과정 수업을 들었다. 당시에는 이 커리큘럼이 새로운 것이었지만, 지금 보면 요즘 여러 미술 디자인 대학에서 제공하는 기초커리큘럼과 비슷하다. 학생들은 다양한 분야를 접하며 새로운 재료, 과정, 기술, 컬러 이론과 구성을 배웠고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완벽한 기하학적 구조러시아의 구성주의와 네덜란드의 데스틸 사조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바우하우스 내에서 고민과 긴장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독특한 표현, 아니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작품. 과연 어느 쪽이 맞을까? 이러한 약간의 긴장감은 창의적인 행동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교장 그로피우스는 기능주의, 어떤 의미에서는 완벽의 실현에 관심을 가지는 실무자들을 교수진으로 임용하는 결정을 내렸다. 완벽의 실현을 표현함에 있어 원, 세모, 네모로 구성된 삼위일체의 기하학적 이미지보다 더 완벽한 것이 또 있을까? 이 시기 유럽 전역에서는 산업 생산시장에 투입되고 새로운 기계를 사용하는 공장의 공정에 맞춰가는 새로운 풍조가 생겨났다. 기계의 효율성과 생산성으로 인력을 줄일 수 있었고 이것은 바우하우스의 유토피아적 창의성에 활력을 불어넣는 새로운 요소가 되었다. 바우하우스의 미술 수업에서는 엔지니어들의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자, 템플릿, T자, 컴퍼스는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이론 뿐 아니라 미술과 디자인 프로젝트에도 새로운 수준의 정확성을 부여했으며 기계적인 미학을 추구하게 했다. 분명하고 직접적이며 효율적인 접근 바우하우스 타이포그래퍼들에게 미래는 산 세리프와 소문자였다. 그리고 기계의 미학이 있어야 했다. 기계의 미학은 1925년에 조세프 앨버스가 세모, 네모, 반원으로 만든 스텐실 서체로도 표현됐다. 끝이 뾰족해지는 곡선이 있는 아름다운 어센더는 베를린에 있는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건물에도 반영됐다. 또 다른 유명한 서체는 1925년에 헤르베르트 바이어가 디자인했는데, 그의 유니버설체는 K와 T를 제외하고 모두 소문자다. 각 글자는 원을 기본으로 만들어졌고 대조나 장식적 요소가 전혀 없다. 이 서체는 분명하고 직접적이며 효율적인 소통을 위한 것이었다. 굉장히 이상적인 목적이었다. 형태에 균형감이 부족하고 바이어가 기대했던 것보다 가독성도 떨어졌지만, 이 서체에서 영감을 얻어 조 타일러는 1969년에 바우하우스 93이라는 서체를 만들기도 했다. 바우하우스의 서체가 아르데코로 여겨진 적도 있지만 ‘기계주의적’이란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대량생산 시대에 걸맞은 아름다운 글자를 만드는 게 목표였으니 말이다. 오늘날에도 디자이너들이 순수한 느낌을 내고 싶을때에는 글자를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하기도 한다. 바이어의 미학에 영향을 받은 파울 레너는 1927년에 푸투라를 만들었는데 이 서체는 오늘날까지도 순수한 기능적 서체로 여겨진다. 푸투라는 글자가 명확해서 헤드라인과 본문용으로 쓰기 좋고 기계의 미학이 담겨 있다. 시카고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짐 쿠달은 아론 드래플린이 현지에서 생산되는 노트를 좋아하는 것에서 영감을 받아, 클라이언트를 위한 디자인 일을 포기하고 자신의 문구류 브랜드를 런칭했고 파울 레너의 푸투라가 브랜드의 중심이라고 설명한다. 잘 보이는 곳에 숨기 오늘날 바우하우스의 영향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래픽 디자인 교육, 그래픽 디자인 실무에도 존재한다. 파브르의 일러스트레이션의 숨겨진 그리드처럼, 바우하우스의 미적 요소가 사용되지 않았어도 우리가 일상에서 작업하고 있는 프로젝트에도 존재한다. 심지어 이 페이지의 여백에도 숨어 있다. 잠깐, 그렇다면 어느 곳에 가장 많이 존재할까? “바우하우스는 첨단 기술 분야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어요. 원래의 실험적인 성격이 정제되어 이제는 매끄러운 아이폰과 센 세리프 서체 같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죠.” - 이스턴 일리노이 대학 미술사 교수, 스티븐 J 이스킬슨 첨단 기술 분야 외에도 광범위한 분야의 바우하우스적 접근방식의 가능성에 열변을 토하는 담론도 존재한다.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분야이든 무조건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받습니다.”라고 마이크 앱빙크는 말한다. 그는 최근에 오픈소스 서체인 IBM의 플렉스의 디자인을 감독했다. “무이르맥닐, 그릴리타입, 리네토에서 나오는 멋진 서체들에서도 조세프 앨버스와 헤르베르트 바이어의 영향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 그리고 인간과 형태, 컬러, 공간, 기계, 재료, 제작 환경과의 관계는 여전히 정체되어있고 그 어느 때보다도 움직임이 필요해요.” 무려 100주년을 맞는 올해에도 '바우하우스'는 여전히 과거형으로 쓰이지 않는다.오늘날 같은 디지털 디자인 시대에 우리는 디자인을 소비하는 사람을 ‘사용자’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디자이너가 해야 할 일은 사물이 아닌 ‘경험’을 디자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러 관념, 분야, 매체를 하나로 모아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고 찾아내는 데 가장 중심이 되는 접근 방식은 오래전 바우하우스로부터 나온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존재하면서 디자이너들이 더 나은 오늘과 내일을 만들 수 있도록 영감을 제공한다. 해당 기사 전문은 CA MAGAZINE #245 <여전히, 바우하우스>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