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의 품격, 북 디자인> CA 콘퍼런스를 바탕으로 작성된 기사입니다. 어떤 요소들이 어떻게 모여 책 디자인의 구조를 완성하는가? 단번에 답하기 어렵다. 분명한 건, 바로 책 디자인의 구조를 이루는 요소를 잘 알고 활용해야 책 디자인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 디자인을 잘 하기 위한 명확한 하나의 방법론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콘텐츠에 따라, 콘셉트에 따라, 디자이너가 각자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에 따라, 혹은 작업 과정에 따라 각기 다른 목적으로 책 디자인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책 디자인의 구조를 잘 짜는 기술이 궁금한 우리는, 단순하게 접근했다. 우선 책 디자인에서 중요한 항목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책의 첫인상과도 같은 표지 디자인, 다음은 본문 디자인에서 타이포그래피와 그리드·레이아웃으로 나누었다. 그런 뒤 각 분야 전문가에게 책의 품격을 높여줄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이들의 이야기는 정답이 아닌 해답, 또는 단서를 줄 것이다. 책 디자인의 기본 구조, 그다음은 무엇일까. · 책 표지 디자인 - 석윤이 그래픽 디자이너 sukyoony.com 파악하기 : 책에 빠져들어라책 표지 디자인을 할 때, 발행 계획서에 나온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시작한다. 이 책이 언제 발행될 예정인지, 발행 부수는 몇 부 인지, 저자는 누구인지, 번역서라면 원제 무엇이었는지 등. 하지만, 이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디자인을 시작하기는 어렵다. 먼저 그 주변의 이야기를 찾아봐야 한다. 열심히 질문을 던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책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지?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까? 만드는 게 번역서라면, 원서의 이미지들은 어떤지, 이 책이 향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질 예정에 있는 건 아닐까? 이 과정에서 책에 애정을 갖게 된다. 말 그대로 책에 빠져드는 것이다. 간혹가다 책을 다 읽어보고 디자인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건 거의 불가능하다. 보통 한꺼번에 몇 가지 책을 디자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분량이 많은 경우 책을 여유롭게 읽고, 받은 감동을 떠올려 디자인에 반영하는, 그런 프로세스는 꿈꾸기 힘들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책 <KPOP 메이커스>는 다 읽었다. 이 분야는 내게 너무 생소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디자이너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책 정보를 알고, 흡수하는 게 중요하다. 먼저는 줄거리를 열심히 읽는다. 줄거리로 부족하면, 일단은 1챕터 정도 간단하게라도 원고를 받아서 읽어 본다. 핵심 구절도 유의해서 보면 좋고, 요약본도 도움이 된다. 결국 책 표지 디자인의 시작은 콘텐츠라 할 수 있다. 콘텐츠를 잘 봐야 한다. 이 책을 어떤 카피를 사용해서, 어떤 방향으로 홍보할 예정인지도 먼저 파악하면 좋다. 또는, 이 책이 해외에서 얼마나 팔렸고, 어떤 반응을 얻었고, 어떤 판본들이 있는지에 대한 정보도 수집한다. 예를 들어 <수용소군도>를 작업할 때, 조사하며 해외에서 빨간색 표지로 작업된 경우를 많이 보았고 최대한 빨간 색은 피해서 작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책을 둘러싼 제반 환경에 대한 조사를 활발히 하다 보면, 디자인 방향을 잡을 수 있다. 나만의 방식 : 색, 일러스트색책에 관한 전반적인 조사가 끝났다면, 책을 받고 떠오르는 이미지를 자유롭게 떠올려 보라. 완성된 책의 크기, 색깔, 디자인을 상상하는 것이다. 혹은 책의 무게나 제본 방식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 나는 보통 이렇게 떠오르는 첫 느낌을 잡아서 빨리 작업에 들어간다. 그러다보면 ‘이 책이 어떤 느낌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보통 그 느낌은 특정한 ‘색’으로 떠오른다. 예를 들어 책 <KPOP 메이커스>는, ‘팝’적인 느낌을 떠올리다 보니, 형광 연두색을 무조건 써야 할 것 같았다. <수용소군도>는 제안서를 보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기록문학이라는 성격 때문에 베이지와 검은색이 떠올랐다.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와 <빨간 수첩의 여자>는 프랑스 문학이라 자연스레 국기를 떠올리다 보니, 파란색과 빨간색을 쓰게 되었다. 특히 이 두 가지 색은 서로 교차하는 느낌으로 사용하며 더욱 효과를 보았다. 별색이 주는 느낌의 쨍함과, 안료의 쨍한 느낌은 서로 다르다. 이 점을 신경써서, 웹상에서 이미지로 볼 때와 달리 실제로 보았을 때 더 청명한 느낌을 줄 수 있도록 수입 박을 써서 색감을 살렸다. 그렇다고 “이 책이 꼭 어떤 색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는 아니다. 단지 나만의 방식일 뿐이다. 물론 이런 생각들은 경험에 의해서 나오는 판단이라, 직관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제 막 일을 시작한 디자이너에게 불가능한 과정은 아니다. 나만의 방식이 있다면 디자인을 더 즐겁게 할 수 있다. 그러니, 디자이너가 자기만의 방식을 가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일러스트나는 사실 선을 똑바로 잘 긋지 못한다. 그런데 오히려 이 특징을 살린 표지 디자인을 할 수 있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책을 작업하기 전에 원서를 참고했는데, 다 잘 그린 할아버지였다. 반면 내가 그린 할아버지는 어설픈 할아버지 캐릭터였다. 그런데 편집자의 반응이 너무 좋았다. 이런 할아버지 일러스트에 파자마를 입히고 슬리퍼를 신기니, 힘없는 할아버지 느낌이 났다. 특히 눈을 잘 그리지 못할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편집자가 “그럼, 선글라스를 씌워봐.”라고 조언했다. 이 캐릭터의 모델인 저자도 괴짜 느낌인데, 선글라스를 씌우니 그런 할아버지의 괴짜 같은 성격이 더 살아났다. 제목도 일러스트와 비슷한 ‘어설픈 콘셉트’로 썼다. 뒷표지에 들어가는 지도도 처음에 그려야 했을 때 막막했지만, 역시 비슷한 느낌으로 그렸다. 이 책에서 만들어진 일러스트는 하나의 포맷이 되었다. 그래서 다른 책에 들어가는 일러스트는 포맷에 디자인 소스들만 바꿔서, 다른 다른 디자이너가 작업할 수 있었다. 포맷을 잘 짠 뒤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시리즈 디자인책 표지에는 꼭 들어가야 할 요소가 있고, 빼도 되는 요소가 있다. 그런 틀을 잘 설계하고, 유지하는 방법도 고민해야 한다. 특히 세트 디자인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는 더욱 신경 써야 한다. 넘버링은 어떻게 할 것인지, 타이틀은 최대로 어느 정도까지 길어질 수 있는지 염두에 두고 서체의 크기와 위치를 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시리즈 디자인만이 갖는 매력이 있다. 바로 한 권에 비해 여러 권이 모였을 때 주는 힘이 다르다는 것. 그래서 이때는 각각의 표지 디자인을 서로 연관 있는 느낌으로 디자인해야 하므로 기획 자체가 까다롭다. 책장에 시리즈를 여러 권 꽂았을 때 책 등을 하나의 그림으로 만들고 싶다면, 인쇄와 제본 단계까지 고려해야 한다. 여러 권이 한꺼번에 나오면 괜찮은데, 지금은 1권이 나오고 앞으로 연속해서 몇십 권이 나올 예정이라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단종될 수 있는 종이 종류는 피하는 등, 앞으로 생길 수 있는 모든 변수를 고려하고 예측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장이 등장하는 추리물인 <매그레 시리즈>는 기획 당시, 72권이 나올 예정이었다. 시리즈 권수가 많을수록 예측해야 하는 변수가 그만큼 많다는 뜻인데, 그래서도 72권은 결코 만만치 않은 숫자였다. 게다가 총, 여자, 피처럼 살인 사건을 직접 드러내는 이미지는 절대 사용해선 안 된다는 저작권사의 주문과 제약이 있었다. 여러 판본을 참고하여 조사한 뒤, 일러스트를 사용하자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시리즈 수였다. 10권까지는 콘셉트를 생각해낼 수 있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일관된 분위기로 디자인을 이끌어갈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탐정을 대체로 상징하는 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파이프를 먼저 그렸다. 그런 다음엔 파이프를 여러 개 모아 모자 모양을 만들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디자인 시안을 만들어서 사람들과 공유했다. 그랬더니 권마다 파이프로 어떤 모양을 만들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나, 이 콘셉트로는 72권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약간 우울한 상태였는데, 그런 감정이 반영되었는지 모자에서 외계인이, 혹은 사물에서 누군가 나오는 일러스트를 그리게 되었다. 그랬더니 평면에서 갑자기 공간감이 형성되며 미스터리한 느낌이 살아났다. 외계인을 탐정으로 바꾸며 시안을 발전시켰다. 한 권씩 나오는 시리즈다 보니, 다음 권 표지에 쓸 사물을 이전 권 표지에 넣어서 복선을 주는 콘셉트로 디자인을 마칠 수 있었다. 다행인지, <매그레 시리즈>는 19권까지 발간되었다. · 타이포그래피 - 유지원 그래픽 디자이너 blog.naver.com/pamina7776 본문 콘텐츠 타이포그래피제목과 디스플레이 타이포그래피는 그래픽 이미지적인 성격이 크지만, 정교한 문자 언어 소통을 위한 본문 타이포그래피는 텍스트를 운반하는 기능적 성격이 강하다. 기본적으로는 ‘책’이라는 종이 매체의 본문 타이포그래피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와 더불어, 긴 텍스트를 다루는 콘텐츠 타이포그래피는 다른 매체로 점차 확장되어 가고 있다. 종이책이 사라지지는 않으리라 보지만, 입지가 위축되거나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특정 매체에 국한하지 않고, 긴 본문 텍스트를 운용하는 기능적인 콘텐츠 타이포그래피 일반을 다루려 한다. 타이포그래피 방정식특히 다른 분야에서 타이포그래피 강의를 하다 보면 청중들이 묻고 싶어 하는 단골 질문이 있다. “그래서 제일 좋은 폰트가 뭐예요?” 이것은 “제일 좋은 숫자가 뭐에요? 3이 좋은 숫자인가요, 5가 좋은 숫자인가요?”라는 질문과 다를 바 없다. 취향에 따라 5보다 3을 더 좋아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3이 5보다 더 좋은 숫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3 더하기 4는 뭐예요?” 질문이 이렇게 되면, 답을 할 수가 있다. 이 질문은 “아이폰에서 중학교 2학년 수학 교재를 만들려는데 가장 적당한 한글 폰트가 뭐에요?” 정도의 질문이 된다. 본문용 한글 폰트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이 정도 질문에는 두세 종의 폰트를 축약해서 답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3 더하기 4”의 답을 알았다고 해서 그 지식이 “7 더하기 9”의 답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덧셈표를 작성해서 문제마다 일일이 참고할 것인가? 덧셈의 원리를 배우는 것이 가장 낫다. 기능적인 타이포그래피에서는 항들을 상정해서 사칙연산이든 무엇이든 ‘관계식’을 세우는 방식으로 문제를 하나하나 차분히 풀어나간다. 방정식을 세우는 방법을 알면, 어떤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변수가 발생해도 적재적소에 폰트를 운용하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보편적으로 설득시킬 수 있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논리와 발언권을 확보하는 것은 중요하다. 디자인은 현상론적으로 귀납하는 경우가 많은데, 패턴화와 연역 능력을 갖추기를 권하고 싶다. 상수와 변수1.인간의 신체방정식을 세우려면 일단 고정된 상수를 찾는 것이 좋다. 기능적인 타이포그래피에서 상수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항이다. 첫 번째가 인간의 신체, 두 번째는 기술 환경이다. 단행본에서 본문 타이포그래피가 비슷비슷해 보이는 이유는, 책이라는 오브젝트의 크기가 변이는 있지만 대개 표준화되어 있고 인간 시력이 전반적으로 편안함을 느끼는 범위가 그 안에서 좁아서 그렇다. 책 표지가 브랜딩처럼 직관적이고 눈에 잘 띄어야 하는 영역이라면, 본문 타이포그래피는 인간을 지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간공학적인 영역이다. 비유하자면, 표지에 쓰이는 글자는 쇼 무대에서 신는 하이힐이다. 취향과 스타일의 영역이다. 반면, 본문에 쓰이는 글자는 마라톤을 할 때 신는 운동화다. 인체의 피로를 덜어주는 운동화의 기능성은 신고 오래 뛰어봐야 좋은 줄 알지 그냥 겉만 보면 별 차이 없어 보일 수 있다.타이포그래피에 어쩐지 규칙이 많다고 갑갑하게 여겨진다면, 그 이유는 인간 신체가 변이가 있다 한들 정규분포의 영역 안에서 어느 정도 수치와 기능이 정해져 있어서다. 규칙을 외우는 것은 의미가 없고 인간이 글자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가령 공룡을 위한 타이포그래피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키가 4m 정도 되는 공룡이 앞발로 책을 눈앞에 들고 오지 못해 초원에 펼쳐놓고 봐야 한다면? 당연히 인간이 30c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볼 때와는 글자 크기도 책 크기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 공룡의 시력이 인간의 시력과 다르다는 것도 변수로 작용한다. 공룡의 시력이 인간과 비슷하다면 책이 엄청나게 커져야 하겠지만, 시력이 훨씬 좋다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그렇게 상수를 정하고, 상황에 따른 변수를 하나씩 조정해나가는 것이 바로 긴 텍스트를 위한 기능적인 본문 타이포그래피의 운용이다. 2. 기술 환경타이포그래피는 넓게는 글자 전체를, 좁게는 활자와 폰트를 다룬다. 손으로 쓰는 글씨는 서예나 캘리그래피의 영역이다. 활자, 그리고 디지털 환경의 폰트는 ‘기계로 쓰는 글자’라고 정의할 수 있다. 글자가 놓이는 매체와 기술 환경이 두 번째 상수다. 금속 활자도 인쇄 기계가 필요하고 디지털 폰트도 컴퓨터든 모바일 디바이스든 기계가 필요하다. 활자는 손으로 일일이 쓰는 글씨와 달리 이미 구성이 완료되고 조립할 수 있는 한 벌 세트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것을 기계로 운용한다. 대량 복제되고, 많은 사람에게 퍼져나간다. 복제하는 데 기계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SNS에 타이핑해서 글을 올리는 것도 타이포그래피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신체’와 글자가 놓이는 ‘기술적인 환경’, 이 두 가지 항을 일단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한 새로운 변수를 발견해서 항을 잘 설정하는 것이 곧 디자이너의 창의성이자 문제해결 능력이다. 하나의 답만 알고자 한다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조건을 고려해야 하는 타이포그래피 능력을 습득할 수 없다. 하이브리드 글자 환경: 한글과 여러 문자 및 기호1. 글자가 태어난 아날로그적 환경한국의 지역 도시에 가면 국적 불명의 궁전같이 생긴, 키치적인 건물들이 간간이 보인다.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그렇게 생경한 건축물이 뜬금없이 지어지기 어려웠다. 그 지역에서만 쓸 수 있는 재료를 써서 그 지역의 생태 환경과 긴밀히 반응해서 그렇다. 그러나 건축 재료가 다양해지고, 운송수단이 발달하면서 그 지역 환경에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건축적 판단을 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게 늘어났다. 이때 풍경과 어울리는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려면 여러 변수를 다 고려해야 할 것이다.오늘날 디지털 타이포그래피 환경이 딱 이런 모양새다. 금속활자 시대에는 대개 숙련된 전문가들만 활자 인쇄 타이포그래피를 다루었다. 이제 에디팅 소프트웨어로 글자의 속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쉽게 폰트를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잘못 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게 늘어난 것이다. 보노보노 배경에 색색 무지개를 넣은 굴림체 PPT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이 풍경이 딱 국적 불명 궁전 같은 키치 건물과 같다. 글자들이 아날로그 환경에서 어떤 형태로 발생했는지 이해하는 것이 폰트를 고르고 서로 섞어 쓰는 요령이다. 가령 볼록판 인쇄와 함께 하던 안정된 올드스타일 로만체는 그 당시 기술 환경에서 나온 그래픽 요소들과 서로 어울린다. 한편 보도니 같은 모던스타일 로만체는 동판인쇄를 배경으로 나왔다.18세기 동판인쇄는 인쇄의 역사에서 해상도가 가장 높은 기술이었다. 오늘날 옵셋 인쇄보다 훨씬 정교했고 가격도 아주 높았다. 정신적으로는 계몽주의 시대를 향해 다가가면서 이성과 논리, 합리를 중시했고 글자체는 제도한 듯한 형태를 갖추어갔다. 종이는 매끄러워졌고, 인쇄술은 정교해졌으며, 아주 가느다란 선을 표현할 수 있는 연성 뾰족 펜이 유행했다. 같은 연성 뾰족 펜으로 매끄러운 종이 위에 표현된 글자라면 스크립트체와 모던스타일 로만체처럼 유형이 전혀 다르더라도 서로 잘 어울린다. 2. 문화권 별 기하학적 공간로마자와 한글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자들은 그 문자들이 생성된 공간 개념이 서로 달랐다. 기하학적으로 공간을 배분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섞어 쓸 때는 문화적 공간 관념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로마자는 베이스라인 위로 글자가 일차원 선형의 방향을 가지며 줄줄이 이어진다. 한글이나 동아시아 문자들은 이차원 정사각형 면적을 한 칸 한 칸 채워 나간다는 공간 관념을 가진다. 이런 배경을 이해해서,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까? 가령 단행본 본문을 한글 명조체로 디자인할 때, 명조체는 사각형 명조체를 채우는 공간에서 생성되므로 시각 중심이 글줄 중간 약간 위에 맞춰진다. 이때 로마자가 작은 크기로 불쑥 튀어나온다면, 로마자는 아랫줄인 베이스라인에 글줄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시선이 쑥 내려갈 것이다.시선의 흐름이 복잡해지면 긴 글을 읽을 때 신체가 더 피로를 느낀다. 이 경우에는 한글이 기준이니 기준이 되는 한글에 로마자의 흐름을 맞춰주어야 시선을 더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 즉 한글 기준 텍스트에서는 로마자를 한글의 글줄 중심을 시각 흐름에 맞게 기준을 올려주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때, “한글과 로마자를 섞어 쓸 땐 한글 글줄 높이에 맞춰 로마자를 위로 올려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은 좋은 타이포그래퍼의 자세가 아니다. “한글의 공간 논리와 로마자의 공간 논리에는 이런 차이가 있으니까, 이렇게 서로 조정하는 게 인간의 신체의 편의에 합당하다.”는 논리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하나 풀면, 더 납득할만한 타이포그래피가 나올 수 있다. 한 가지 부연하고 싶은 것은 1883년 이후 한글의 공간은 동아시아 전통 공간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은 하이브리드 환경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컴퓨터’, ‘오렌지’는 순우리말 아닌 외래어이지만, 외래어도 엄연한 외국어 아닌 한국어이듯이, 숫자와 띄어쓰기 공간, 문장부호도 다른 문자문화권에서 유래했지만 이제 한글 문자 생활의 일부가 된 외래 문자다. 한글의 공간 환경이 하이브리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글자 장치들이 여전히 산적해 있어, 한글 사용자들의 올바른 글자 감각을 해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내가 디자인한 셰익스피어 전집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 중 하나는 문장부호 디자인이다. 물음표, 느낌표, 쉼표, 마침표 모두 직접 디자인해 넣었다. 기존 로마자 폰트 문장부호도 한글 폰트 문장부호도, 내가 적용한 본문 한글 글자체에 딱 어울리지 않아서 그렇게 했다. 비례 및 흰 공간의 흐름, 그리고 물리적인 재질지면 혹은 화면에서 글자를 아름답게 운용할 때는 그 문자문화권의 공간 관념과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하고, 그다음 단계로는 아름다운 비례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흰 공간의 흐름을 잘 디자인해야 한다. 오늘날 소프트웨어에서는 수치를 입력한다. 하지만 인간의 눈이 인지하는 것은 요소 간의 비례와 관계이다. 타이포그래퍼는 작업자 위주의 소프트웨어 기능 답습에 그치지 않고, 이 점을 잘 이해해서 독자의 신체 편의에 적합하게 글자가 담기는 조형을 잘 ‘번역’하여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루이 14세는 아름다운 글자와 지면의 비례를 위해 프랑스 왕립 과학원의 수학자들과 엔지니어들에게 계산을 수행하도록 했다. 그러면 우리도 그들의 업적을 그대로 답습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여기서 우리가 또다시 고려해야 하는 것이 물리적인 재질과 기술 환경의 차이이다. 루이 14세 시대의 비례를 당시에 사용된 재질감이 강한 수제 종이와 볼록하게 꾹 찍히는 금속활자에 적용하면 최적으로 아름답지만, 지금 이걸 컴퓨터로 똑같이 디자인해서 레이저 프린터로 창백한 복사지에 뽑으면 어딘가 벙벙하고 비어 보일 수밖에 없다. 후자는 물질성이 약한 재질을 갖고 있기에 그만큼 밀도 높은 디자인으로 채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좋은 타이포그래퍼는 흰 공간의 흐름을 유심히 디자인한다. 빈 종이에 똑같은 크기의 폰트만으로 디자인할 때 어느 한쪽은 더 좋아 보이고 어느 한쪽은 덜 좋아 보인다면, 그것은 비례와 흰 공간의 디자인이 차이를 만든 것이다. 팬그램팬그램이란 하나의 짧은 문장에 모든 철자가 들어가서 폰트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한눈에 알게 하는 문장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팬그램은 “다람쥐 헌 쳇바퀴에 타고파”가 있다. 하지만 이 문장은, 가로획 중성이 하나밖에 없는 등 균형이 치우쳐있다. 한글은 초성, 중성, 종성이 하나의 음절로 모이는 모아쓰기 모듈 글자다. 로마자와 달리 음절로 모아쓰기를 한다. 로마자는 26개 철자가 한 문장에 모두 들어갈 수 있다. 한글은 초중종성 음소는 기본 24개이지만, 이들이 결합한 모아쓰기 음절은 11,172자에 이르기에, 모든 음절이 한 문장에 들어가긴 불가능하다. 초성 낱자의 인상 이상으로 모듈 구성이 폰트별로 큰 변별요인이 된다. 따라서 받침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가로획 중성, 세로획 중성, 가로세로 섞은 획 중성, 빗침 등 몇몇 특수한 조형 요소, 획수가 많고 밀도가 높은 글자와 헐거운 글자, ‘ㅅ’ 계열과 ‘ㅇ’및 ‘ㅎ’ 계열, ‘ㅁ’ 계열 등 한글 고유의 조형 요소들을 골고루 보여주는 편이, 로마자와는 다른 구조로 기능하는 한글의 폰트들을 서로 구분하기에 적절하다. 그래서 나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문장 말고, 이런 요소들을 다양하게 두루 포함한 낱글자들을 모아서 나름대로 고안한 팬그램을 쓴다. “한아름 꽃빛 옹이 왕 무늬 셋” ‘옹이 왕’은 중성과 모듈 구조에 따라 ‘ㅇ’이 찌그러지는 정도를 보기 위한 장치이고, 모든 글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어 들어간 것이다. ⓒ유지원 그래픽 디자이너 · 그리드와 레이아웃- 안마노 그래픽 디자이너 ahnmano.com그리드와 레이아웃그리드와 레이아웃은 하나의 책 안에서 일정한 조형 법칙을 유지하고, 디자이너의 작업을 수월하게 해주기도 하는 하나의 장치다. 궤, 격자, 계획을 짜 놓는 것이다. 건축 분야에 비유하면, 도시 개발 마스터 플래너가 토지구획뿐 아니라 구역별로 용도를 설정해 이후 지어질 건축물의 크기와 성격을 지정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보면 책을 디자인하는 우리는 책이라는 평면에서 글자가 들어가는 공간, 그림이 들어가는 공간, 쪽 번호 같은 다른 장치들이 들어가는 공간 등을 배치하고 계획하는 ‘북 마스터 플래너’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석고 정물 수채화로 미대 입시를 치렀다. 5시간 동안 2절 도화지에 석고상과 정물이 들어간 수채화를 완성하는 종목이었다. 입시 미술에서는 특히 시간 관리를 위한 전략이 중요했다. 예를 들어 자신 있는 정물은 앞에 놓고 그렇지 않은 건 뒤로 밀거나 숨기며, 강조할 데를 강조하고 생략할 부분은 생략하는 등. 판단에 판단을 거듭하며 잰걸음으로 도화지를 채워나갔다. 정물이 지닌 아름다움도 언뜻언뜻 느끼면서. 생각해보면, 책을 디자인하는 과정과 이 입시 정물화를 그리는 과정은 비슷하다. 정해진 시간 동안 주어진 재료로 최선의 계획을 짜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결국에는 같은 일을 계속해오고 있는 것 같다.마치 일정 관리를 하듯,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시간을 잘 분배하여 적절한 자리에 배치하는 것. 그런 표현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재료들이, 책 디자인에도 있다. 재료 1. 표지, 면지, 판권, 차례, 서문, 추천의 글, 장표지, 본문, 감사의 글, 부록, 미주, 참고문헌, 도판 출처, 색인, (광고)기본적으로 책에 들어가야 하는 재료들이 있다. 책에 따라서는 이런 재료를 하나씩 생략하기도 한다. 어떤 책에서는 추천의 글이 없을 수도 있고, 장표지가 없을 수도 있다. 감사의 글을 작가가 안 쓰는 경우도 있다. 특히 안그라픽스는 학술서나 전문서 위주로 만들었기 때문에, 미주, 각주, 출처, 한·영 병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책 10권 중에 7~8권에는 그런 시스템이 있었던 것 같다. 재료 2. 글, 제목, 번호, 그림, 사진, 캡션, 미주·각주, 표, 면주, 쪽 번호좀 더 미시적으로 본 기준에 의해 나눈 재료는, 이런 재료들로 마치 요리를 위한 레시피 같은, 그런 계획을 하는 것이 그리드와 레이아웃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계획 0. 판형 북디자인의 시작은 판형을 결정하는 것이다. 판형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종이 사양이 정해진다. 원고를 모두 담았을 때의 책 두께도 파악할 수 있다. 판형은 북디자인의 물리적인 많은 것들을 결정해주는 요소이다. 출판 마케팅 관점에서 전략적으로 택하는 부분도 있다. 책을 만든다는 건, 컴퓨터에서 디자인한 걸 인쇄로 번역하고, 다시 인쇄를 제본으로 번역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그 시작이 바로 종이, 판형, 즉 종이 크기다. 또 하나는 ‘결’이다. 종이 크기마다 쓸 수 있는 결이 정해져 있다. 제본 후 책이 습기를 먹고 팽창하면서 찌그러지느냐 마느냐에 관한 문제로 직결된다. 이런 이유로 사용하고 싶은 종이와 결을 확인하여 판형 계획을 세우는 게 중요하다. 계획 1. 흐름, 분량, 리듬, 시작과 끝(중), 시작과 끝(대)‘페이지네이션’이라는 말이 있다. 섹션마다 분량이 어느 정도 되는지를 정하는 과정이다. 책의 시작과 끝, 한 챕터, 한 단락에서의 호흡을 다듬어 책의 ‘리듬’을 결정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실질적인 툴로는, ‘쪽 배열 표’라는 탬플릿을 쓴다. 왼쪽부터 16쪽까지 되어 있고, 다시 17쪽까지 32쪽까지. 16쪽 단위로 나누어져 있다. 단행본 같은 경우, 변수가 많지는 않아서 아주 잘 쓰진 않았지만, 가끔 도판이 많은 책에서는 책 구성을 조망하기 위해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가급적 페이지네이션은 16쪽, 8쪽에 맞춰서 짜는 게 좋다. ‘16진법 사고’가 중요하다고 할까. 인쇄와 제본 과정에서 16절 단위로 접지를 이어 붙여 책을 만들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구조를 파악하기 쉽다. 4쪽 단위도, 심지어 2쪽 단위도 제작도 가능하긴 하다. 예를 들어, 18쪽짜리 책을 만든다면, 16쪽에 2쪽을 따로 붙여 책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별개의 과정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라, 되도록 16쪽 혹은 8쪽 단위로 맞추면 좋다. 계획 2. 위계, 배치, 밀도, 분포, 서체, 글줄 길이, 여백의 비례그리드와 레이아웃과 가장 관련 있는 계획은 바로 판면 계획이다. 글을 파악하고, 위계라든지, 배치 관계를 파악한다. 약간 멀리서 봤을 때 먹의 밀도, 회색도의 분포를 본다. 글줄 길이는 워낙 사람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줄 길이가 형성되어있기 때문에 너무 짧아져도, 너무 길어져도 안 된다. ‘여기는 넓고, 여기는 좁다’는 느낌처럼, 여백의 비례 관계에서 느껴지는 리듬감도 중요하다. 최근에 작업했던 책의 레이아웃이다. 제목과 그림, 여백에 관한 계획을 짜놓은 마스터 페이지이기도 하다. 사각형 크기와 글줄의 위치, QR코드의 위치 등을 생각하여 가상의 선 정리를 세세히 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의 근원적인 행위인 것 같다. 청소, 정리하는 본능이랑 좀 닮았다. 인디자인에서는 스타일 기능을 쓴다. 다량의 글을 다룰 때 효율적인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다. 이 스타일 개념은 웹디자인에서 스타일시트 개념과 맞닿아 있다. 이를 잘 다룰 줄 알면, 글줄을 일일이 수정하지 않고 변수를 조정하면서 특정 패턴들을 만들 수 있다. 결론적으로는 효율적으로 조판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고려할 요소: 3X3의 법칙, 경계와 축, 미장센, 몽타주3X3의 법칙은, 미술 시간에 배웠던, 가로 3등분, 세로 3등분의 가상의 선이다. 이 격자를 기준 삼아 주제물을 배치하면 굉장히 안정적인 느낌이 든다. 이는 책의 레이아웃 혹은 사진을 자를 때도 유효한 식인 것 같다. 사각형의 조합으로 그리드나 레이아웃을 구성하면서 시각적인 축을 활용해 균형을 찾기도 한다. 구획이 잘 짜여 있어도 축이 흐트러져 균형감이 불안해 보일 때가 있다. 이 둘을 잘 고려하면서 판면 안에서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판면 안에서 배치의 미감은 영화로 따지면 화면에서의 구도, 미장센이이라는 개념에 대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몽타주는 영화에서도 컷과 컷의 배치로 파생되는 어떤 새로운 의미나 기분들, 느낌들인데, 책에도 적용이 되는 것 같다. 책도 한편으로는 인터랙티브하긴 하지만 한쪽으로 흐르는 걸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을 잘 염두에 두고 순서를 짜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리드 시스템을 정해 두면, 책 작업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모든 경우를 아우르는 법칙은 세우기 힘들다. 재정립하거나 심하면 포기를 해야 하거나,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 변수를 관리하는 건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그렇게 변수를 다루는 과정을 즐긴다면, 책 디자인 과정도 재밌게 겪어낼 수 있을 것이다.